6.25 전쟁 직후부터 71년 동안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프랑스 출신 두봉 레나도 주교가 한국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10일 96세로 선종한 두봉 주교의 장례미사가 14일 천주교 안동교구 주교좌목성동 성당에서 열렸습니다. 1982년 프랑스 정부에서 나폴레옹 훈장, 2012년에는 만해대상 실천부문상, 법무부가 주관하는 올해의 이민자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적도 취득했습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분의 유언대로 경북 예천의 농은 수련원 내 성직자 묘원에서 영면하신 두봉 주교님은 한국 현대 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평생을 한국 땅에서 살아오며 우리말로 복음을 전하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에도 헌신한 그분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지였습니다
두봉 주교님의 선종은 많은 신자들에게 '믿음의 길'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성지를 돌아보는 순례 여정에 나서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봉 주교님의 삶을 기리며 한국에서 의미 있는 천주교 성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중림동 약현성당 &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 - 한국 천주교의 첫 본당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청파로 447-1
약현성당은 현존하는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 1892년에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가 설계, 감독하였습니다. '약현'은 성당이 위치한 만리동 입구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약초밭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약현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 성인들 가운데 44명의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순례 기념 성당입니다. 성당 근처에 이승훈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신유, 기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축복식에서 약현 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본당 안에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세웠고, 이곳에 마련된 기념 성당과 전시실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 교리서와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교회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봉 주교님은 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의 공동체"라 말씀하셨는데, 약현성당은 그러한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은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삼성산 성지 - 서울 관악구의 영성 공간
위치 : 서울특별시 관악구 호암로 545
삼성산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범 주교와 성모방 베드로 나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정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곳입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세 성직자는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관가로 나아가 자수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라는 특별한 절차로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 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오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 되자 이를 기념하여 19889년 명동 성당에서 세 성인의 유해를 일부 옮겨 와 안치하고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세 분 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월례미사가 이분들의 순교일인 21일(9월 21일)로, 주일미사는 부활 제2주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 일까지 봉헌되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숲이 우거진 이 성지는 마치 초대 교회의 공동체처럼 기도와 묵상의 장소로 적합하며, 도심 속 자연과 영성이 함께 어우러진 ‘숨겨진 성지’로도 불립니다.
삼성산 성지는 일반적인 성당 중심의 성지와는 달리, 기도의 산책로와 성모마리아 동굴, 십자가의 길, 성 요셉 경당 등이 숲길과 함께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걷는 순례자에게 깊은 묵상과 내면의 평화를 선사합니다.
두봉 주교님 역시 삶의 많은 시간을 ‘자연과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로 표현했는데, 삼성산 성지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새남터 순교성지 - 한국 성인들의 피가 흐르는
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는 '새나무터'의 준말로 억새와 나무를 합한 것이 '새나무'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부터 이곳엔 억새와 나무가 무성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8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3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 성지입니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입니다.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엥베르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하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발길을 멈추고 기도를 올리는 곳으로 현재 새남터 기념성당, 성인 유해를 모신 제대, 그리고 순교자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단순한 역사적 장소를 넘어서 성인들의 믿음과 희생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은 두봉 주교님께서 생전에 자주 언급했던 ‘젊은이의 용기 있는 신앙’이 떠오릅니다. 주교님은 젊은 세대에게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삶’이라 말씀하셨는데, 새남터는 그런 말씀을 실천으로 보여준 성지입니다.
4. 절두산 순교 성지 - 고독한 믿음의 길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은 예로부터 가을두, 잠두봉, 용두봉 등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서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습니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외에 조성된 조형물과 기념비들은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어울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며, 성지를 찾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순교 신앙, 선교, 문화체험 등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두봉 주교님은 이곳을 '신앙의 꽃밭'이라 표현하며, 단순히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부활의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바라보셨습니다. 한강을 따라 조용히 흐르는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도의 시간을 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5. 솔뫼 성지 - 하느님의 노래가 흐르는 공간
위치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산45-3
충청남도 당진에 위치한 솔뫼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입니다. 솔뫼는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자연과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공간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김대건 신부의 생가만을 기리는 곳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순교정신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지 안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 기념관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청각 자료와 체험 공간을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의 순례객에게도 인기입니다.
두봉 주교님이 강조하셨던 ‘신앙의 실천’이라는 가르침과 잘 맞닿아 있는 공간이며, 순례자는 물론 종교교육의 장으로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6. 황사평 성지 - 제주의 숨은 순교지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기와 5길 117-22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 때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 확보를 위해 파견되어 온 봉세관이 과다한 조세 징수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여기에 조세 중간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 때문에 교회는 많은 오해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미신 행위 등 신앙에 위배되는 지역 풍습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자주 충돌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무리한 전교 활동과 왕실 조세 정책에 저항한 민회가 1901년에 대정현(현 모슬포)에서 열리면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700여 명의 신자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는데, 이를 '신축교안'이라고 합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정된 뒤 교회는 별도봉 밑에 묻혀 있던 교우들 가운데 무연고 시신 31기를 이곳 황사평에 이장하였으며,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이곳을 공원묘지로 새롭게 단장하여 무명 순교자 합장묘로 조성하였습니다.
두봉 주교님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면, 제주의 신자뿐 아니라 전국 신자들이 이곳 황사평을 순례하며,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되새기고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큰 의미가 될 것입니다.
마무리
두봉 주교님을 기억하며, 다시 걷는 믿음의 길
두봉 주교님의 삶은 진정한 신앙의 순례 그 자체였습니다. 외국인이지만 한국을 ‘하느님이 인도한 땅’이라 여겼고, 모든 생을 한국에서 살며 민중과 함께 했던 주교님의 삶은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삼성산의 조용한 산책길, 새남터의 순교 정신, 황사평의 뿌리 깊은 신앙 등, 이 성지들을 천천히 순례하다 보면, 단순히 과거의 신앙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거룩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두봉 주교님의 선종이 단지 이별이 아닌, 새로운 신앙 여정의 시작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조용히 마음을 비우고 성지로 향해 보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